[대전인터넷신문=세종/최대열기자] 13일 세종특별자치시의회에서 ‘세종‧제주 주민자치 추진방향 토론회’가 개최됐다. 이번 토론회는 단순한 제도 개선 논의를 넘어, ‘풀뿌리 민주주의’의 철학과 인간 존엄의 회복을 논의하는 사상적 장이 되었다.
세종/제주 주민자치 추진방향 토론회 [사진-대전인터넷신문]
기조 강연을 맡은 안성호 대전대학교 석좌교수(전 한국행정연구원장)는 “자치는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품격이며, 어두운 시대의 민주주의를 다시 밝히는 길”이라며, 세종을 한국형 주민자치 실험의 중심으로 제시했다.
이번 토론회는 세종주민자치연구회, 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교육위원회, 지방분권세종회의, 세종시의회, (사)새로운생각연구소, 세종주민자치 사회적협동조합 등이 공동 주최했다.
행사는 김연복 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교육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김준식 세종주민자치연구회 회장의 인사말과 이춘희 지방시대위원회 위원장의 축사에 이어, 안성호 교수의 55분간 기조강연이 이어졌다.
김준식 회장은 인사말에서 “읍면동 주민자치가 단순한 행정보조가 아니라 진정한 시민참여의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며, “세종이 행정수도를 넘어 자치수도로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세계사 속 자치의 뿌리, 그리고 세종의 실험
안성호 교수는 ‘풀뿌리정치와 인류진보’를 주제로, 인류 문명사는 곧 자치의 역사라고 규정했다.
“고대 그리스의 민회는 그리스 문명을 낳았고, 로마의 공화정 민회는 로마문명을, 뉴잉글랜드의 타운미팅은 미국혁명을, 스위스의 코뮌자치는 ‘스위스의 기적’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본질은 선거가 아니라, 시민이 공공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행위”라며, “세종의 읍면동 자치는 이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할 실험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시베리아 한인 마을자치, 시민자율의 원형
안 교수는 구한말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1897)을 인용하며 “시베리아 한인촌의 번영은 마을자치에 있었다”고 소개했다.
비숍은 한국의 비참한 왕조사회와 대비되는 시베리아 한인촌의 자율과 협동을 목격하고, “그곳의 주민들은 부패와 불신을 협력과 신뢰로 바꿔냈다”고 기록했다.
시베리아의 한인들은 제정러시아가 허용한 공적 자유의 공간에서 자치역량을 발휘했고, 청결한 주거, 질서 있는 마을 운영, 공동체 중심의 농업경영으로 ‘윤택한 삶’을 영위했다.
안 교수는 “이는 단순한 이민사가 아니라, 자치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품격을 세우는 역사적 증거”라고 강조했다.
■ 관료주의의 타락, 민주주의의 위기
안성호 교수는 “구한말 관료사회는 권력층의 탐욕이 백성을 수탈한 전형적인 부패국가였다”며, “오늘날 한국 사회가 그 구조적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IPSOS(2021), Pew Research Center(2022), V-Dem(2025)의 조사결과를 근거로 “한국은 세계에서 정치·이념 갈등이 가장 극심한 나라”라며 “자유민주주의에서 선거민주주의로 후퇴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또한, “공직 경쟁과 편가르기, 난제 회피, 속론정치가 일상화되면서 국민이 공공영역에서 발언할 자유를 잃었다”며 “이는 곧 민주주의의 공적 행복이 사라진 사회”라고 경고했다.
■ ‘어두운 시대의 인간’과 자치의 철학
그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과 『혁명론』을 인용하며 “전체주의는 시민의 공적 자유가 사라질 때 태어난다”고 말했다.
“정치적 자유는 단지 투표권이 아니라 통치에 참여하는 권리다. 공적 토론과 행위가 봉쇄된 사회는 ‘어두운 시대의 인간’을 낳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생존과 생산성만을 추구하는 ‘노동하는 인간(Homo laborans)’이 아닌, 행위하고 말하는 인간이 되어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세종의 읍면동 자치가 바로 시민의 ‘행위의 자유’를 복원하는 공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다중심 거버넌스와 ‘자치하는 인간’
엘리너 오스트롬의 ‘다중심 거버넌스’ 이론을 언급하며, 안 교수는 “중앙집권은 효율적이지만 민주적이지 않다. 다양한 자치 중심이 경쟁하고 협력할 때 사회는 학습과 혁신을 이룬다”고 말했다.
그는 “세종의 읍면동 자치는 발언권과 공동생산, 공공혁신역량을 키우는 훈련장이자, 시민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민주주의 학교”라고 설명했다.
■ 민주공화정의 본질, ‘공적 행복’의 회복
헌법 제10조를 인용하며 그는 “국가는 국민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이는 사적 행복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진정한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함께 통치에 참여하며 공적 행복을 누릴 때 완성된다. 세종의 주민자치는 그런 자유의 공간을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세종에서 시작되는 ‘인간의 자치’
안성호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세종의 실험은 단순한 행정 개혁이 아니라 인간 존엄의 회복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자치의 등불이 빛나야 한다. 세종의 시민이 스스로 결정하고 토론할 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일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김현경(고운동 주민자치회장), 이항선(박곡동 주민자치회장), 조상호(새로운생각연구소장), 이순열(세종시의원) 등이 참여해 “세종형 읍면동 자치모델은 국가균형발전의 새로운 대안”이라며 입을 모았다.
이번 토론회는 단순한 지역자치 논의가 아닌, 시민이 주권자로서 스스로 배우고 결정하며 토론하는 ‘참여민주주의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참석자들은 “세종이 행정수도를 넘어 ‘자치수도’로 성장할 때,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세종시의 주민자치회 관계자들은 내년부터 읍면동 단위 자치 역량 강화와 주민참여예산 확대 등 구체적 실천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특히, 이날 논의된 ‘자치의 철학’과 ‘공적 행복’의 개념은 향후 세종형 자치모델 설계의 핵심 가치로 반영될 전망이다.
끝으로 안성호 교수는 “자치는 제도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품격의 표현”이라며 “세종이 보여줄 풀뿌리 민주주의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다시 이끌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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